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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역사인문학 (커버이미지)
    [역사]나의 역사인문학
    • 마석한 지음
    • 여래
    •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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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물의 역사 -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 (커버이미지)
    [역사]뇌물의 역사 -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
    • 임용한.김인호.노혜경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7-12-07

    돈으로 이룬 제국은 돈으로 망한다!지금 이 순간에도 뇌물은 진화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뇌물의 실체를 고대와 현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해 파헤치다. “백성이 가난한 것은 아전의 탐학 때문이고, 아전의 탐학은 뇌물 때문이며, 뇌물이 자행되는 것은 법이 해이하기 때문이다.” _성호 이익국제투명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전 세계 107개국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4분의 1이 1년간 누군가에게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4명 중 1명이 뇌물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뇌물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시끄럽다. 그리고 여론은 항상 뇌물에 민감하다. 하루걸러 뇌물과 관련된 비리로 권력자들이 자신이 세운 왕국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뇌물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다. 정치, 경제는 물론 스포츠계를 넘어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큰 위험을 안기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뇌물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진화해오고 있는지 파헤쳐보자. 뇌물인가, 선물인가?뇌물은 영어로 ‘bribe(브라이브)’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자선이나 자비심을 베풀 때 쓰는 선의의 물건을 일컫는 말이다. 중세 시대에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소소하게 건네지는 돈으로 뇌물이라고 하기에는 적고,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대가성이 있음으로 그 경계가 모호하다. 영국에서는 ‘집에 가다가 모자나 사서 쓰라’며 공무원들에게 푼돈을 쥐어주던 관습에서 뇌물을 ‘해트(hat)’라고도 표현한다.내가 주면 선물이지만, 남이 주면 뇌물이라고 판단하는 이중적 기준이 뇌물의 전염성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뇌물이라고 하면 거대한 돈이 오고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1960년대 한 공무원은 기업체를 방문하였을 때 얻어먹은 냉면 한 그릇에 부패 공무원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가장 쩨쩨한 뇌물 사건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뇌물과 선물의 경계는 모호하다. 우리나라 ‘공무원 행동강령’에서는 뇌물과 선물을 돈의 액수로 규정하고 있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의도된 대가의 유무에 따라 뇌물과 선물이 구분지어진다. 대부분의 문제는 항상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 야기한다. 탕왕의 6가지 반성으로 보는 뇌물의 역사하나라를 정복한 후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즉위 후 7년 동안 가뭄과 흉년이 들었다. 이에 자신이 잘못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느낀 탕왕은 6가지 반성의 글을 적어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탕왕의 6가지 반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가 절제되지 않고 문란하지 않은가? 둘째,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경제가 어렵지 않은가? 셋째, 궁전이 화려하고 사치스럽지 않은가? 넷째, 여자의 청탁이 성하고 정치가 불공정하게 운영되지 않는가? 다섯째, 뇌물이 성행하지 않는가? 여섯째, 참소로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중 뇌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다섯째 항목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정치가 절제되지 않고 문란하다는 것은 그 가운데 뇌물로 인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경제가 어려워지는 데에는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정권과 결탁하기 위해 뇌물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탕왕의 6가지 반성을 통해 뇌물을 살펴보는 이유는 각 항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뇌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6가지 탕왕의 반성을 통해 뇌물을 살펴본다. 그러면 뇌물이 얼마나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지, 사회나 국가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뇌물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뇌물은 거대한 범죄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소소한 일상의 범죄이기도 하다. 급행료, 불법적인 수수료, 약간의 사례 등 범죄라고 일컫기에도 소소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뇌물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쌓이면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진다. 뇌물은 가장 명확할 것 같으면서도 가장 모호한 범죄이다. 수십억 원을 받았음에도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뇌물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 끼 식사 값도 안 되는 돈을 줬다는 이유로 뇌물죄로 입건되기도 한다. 뇌물은 이렇게 소소하지만 거대하게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야기하고 200년간 전쟁을 지속한 십자군원정은 한 번의 뇌물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 1차 원정 때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안티오크를 만나게 된다. 이 성을 넘어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도 떨어져가고 있었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또 투르크의 군대도 거의 당도하고 있었다. 그때 십자군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보에몽은 성의 한 구역을 지키고 있던 수비대장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고, 십자군은 결국 안티오크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공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문화를 동양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양의 사상을 세계 지배 사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뇌물 퇴치 전략_ 김영란법의 원조는 세종이다!김영란법은 공직자가 직무 관련성이 없는 사람에게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았을 때 대가성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소위 대가성이 증명되지 않는 스폰형 뇌물도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스폰형 뇌물은 고도한 뇌물 수법으로 선물과 뇌물로 구분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조선시대에도 인정과 뇌물을 한계를 구분하는 일은 큰 문제였다. 조선은 ‘뇌물 천하’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뇌물이 성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뇌물 관련 사건이 3,000건이나 될 정도이다. 하지만 고위관료들이 받는 뇌물 비리에 대해서는 그 처벌이 관대하였다. 1424년 어느 여름날, 세종은 폭탄선언을 했다. 뇌물과 관련하여 받은 사람과 준 사람 모두를 처벌하겠다는 ‘양자처벌법’을 선포한 것이다. 국가 경쟁력 강화와 건전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고대부터 현대, 동서양의 역사는 뇌물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뇌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하고 있다. 뇌물은 힘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 속에 소소하게 선물이라는 개념과 혼동되며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물은 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동서양과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역사를 통해 뇌물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뇌물이 사라지지 않는지, 뇌물이 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의의는 뇌물을 근절시키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뇌물의 본질을 알고, 역사적으로 되돌아봄으로써 조금 더 건전하고 밝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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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 오늘날의 문제들에 답하는 인류학 (커버이미지)
    [역사]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 오늘날의 문제들에 답하는 인류학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류재화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09-21

    타자의 시선으로 현대 문명을 진단한다!복잡한 현대사회의 질문에 답하는 인류 지혜의 보고, 인류학현대 인류학의 거장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쓴 최고의 인류학 입문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인류학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1986년 일본에서 현대 인류학의 거장 레비-스트로스가 했던 세 차례의 강연을 담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는 이 간단하지만 거대한 질문 앞에 제출한 답변이다. 그는 성급히 답을 제시하는 대신 인류학이란 어떤 학문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은연중에 ‘원시적’이라고 무시되는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구 문명의 패권이 종말을 맞이한 오늘날 새로운 문화‥문명적 비전을 어떻게 밝혀나가야 하는가를 논한다.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학과 인류학적 정신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현대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난다.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른바 ‘원시’사회는 자체적인 내적 논리와 가족 및 사회 구조를 지니며, 나아가 “인간 조건의 공통분모라고 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인류의 전 역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지속되어오면서 “행해진 경험들”의 보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사회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은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유일한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성, 경제, 인종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답하고 있다.이 책은 독자에게 인류학의 거장이 직접 쓴 쉽고 충실한 인류학 입문서이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 문명에게 요구되는 ‘인류학적 정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보고서로서 다가갈 것이다.인류학은 다른 사회과학과 어떻게 다른가?인류학은 그 방법과 목표에 있어서 여타의 사회과학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인류학은 ‘객관성’과 ‘전체성’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 형태는 다른 사회과학과 다르다.인류학이 희망하는 ‘객관성’은 현상과 개념 자체만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까지 다가가고자 한다. 예컨대 경제학은 가치, 수익성, 한계생산성 등등을 다루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루지 않는 반면에, 인류학은 경제적 관계가 그 사회에서 갖는 ‘의미’까지 자세히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법학, 경제학, 인구학, 정치학 등이 하나의 전체를 조각으로 분해하여 분석하는 것에 그친다면, 인류학은 그런 사회생활의 모든 양상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된 하나의 체계를 봄으로써 ‘전체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생활 이면의 공통의 형태, 즉 불변하는 속성을 밝혀낸다. 이렇게 인류학은 ‘종합적인 객관성’을 추구하고자 한다.이를 위해서 인류학자에게는 사려 깊은 이중성이 요청된다. 인류학적 고찰은 관찰자의 문화와 매우 다른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는 동시에, 마치 관찰자 스스로가 다른 문화에 소속된 것처럼 자신의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는 이중의 시선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차가운 이성적 눈으로 대상을 재단하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문화를 되돌아보는 성찰이 가능해진다.인류학이 타자로부터 배운 것들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이 ‘인간 현상’에 대한 학문, 특히 사소하더라도 다양성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친족관계와 결혼 규칙, 노동의 배분, 거주지 규칙 등이 그 예이다. 인류학자는 이른바 ‘원시’사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다양한 현상 속에서 일정한 질서 체계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 조건의 공통분모라 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반품”처럼 취급되던 주변부 사회가 도리어 본연의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위협이 없으면 완벽히 지속될 수 있는 사회임이 드러난다.인류학은 ‘원시’사회가 지니고 있는 간과되어왔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다룬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방식과 가치가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 체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오늘날의 문명은 보장할 수 없게 된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균형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교훈을 준다.오늘날 인류가 하나의 세계 문명으로 향해 갈수록 문화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획일화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이라는 개념이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문화들의 공존을 의미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시’사회들이 지니고 있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의 문명에 획일적인 관점이 아닌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던져준다. 인류학적 지식이 인류 지혜의 보고로서 가치를 갖는 이유이다.현대 문명의 위기에 답하는 인류의 지혜서구 문명과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이념적 폭발”과 전체주의, 환경의 파괴, 늘어나는 기아, 끝을 모르고 확대되는 생산과 소비, 공격적인 관료제 등의 폐해로 인해 깨진 지 오래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이 담고 있는 지혜가 현대사회의 위기에 답하기 위한 대안적 길을 열어나가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물론 인류학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와 거대화된 현대사회를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원시’사회로의 회귀도 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인류학 연구를 통해 쌓인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들과 “행해진 경험들”에 대한 지식들은 현대의 문제를 서구적 시각에서 벗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잠재력을 지닌다.예컨대 전통적 가족 형태와는 다른 형태의 가족의 등장을 둘러싼 문화적?윤리적 갈등에 대해, 인류학은 다양한 사회의 온갖 종류의 가족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족 형태를 비정상적이고 도착적이라고 단정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고 과도한 사냥이나 채집을 제한하고 경쟁을 배제하며 토지 사유화를 거부하는 ‘원시’사회의 모습은 환경의 파괴와 극심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등으로 위기에 처한 산업문명에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세계화 시대의 이주민 증가에 따라 다시 강화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인류학은 왜 인종적 경계가 임의적인 것일 뿐이며 인종과 문화의 발전이 별개의 것인지 증명한다.거장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인류학 입문 강의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인류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심층에 깔려 있는 의식되지 않은 구조를 밝히는 구조주의적 사유를 통해 지성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거인이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방대하고 복잡해서 쉽게 접근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현대 인류학의 거장이 복잡한 구조주의적 개념을 최대한 배제하고 가장 쉬운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현대에 갖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에게 인류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며, 나아가 미래에 대한 열린 사유를 펼치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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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커버이미지)
    [역사]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09-21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백년전쟁 이야기21세기에 톺아보는 왕좌의 게임“이보다 쉽고, 재밌고, 정확하게 백년전쟁을 풀어쓸 순 없다.”왕위 계승권을 놓고 시작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근대 국가의 맹아를 잉태시킨 백년전쟁. 숭고한 기사도 정신과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이 혼재한 백년의 대서사시가 21세기에 되살아난다.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의 서막을 연 에드워드 3세, 몸은 허약했지만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으로 전쟁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샤를 5세, 프랑스 정복을 눈앞에 두었지만 죽음 앞에 결국 무릎 꿇은 헨리 5세, 명실 공히 백년전쟁 최고의 스타 잔 다르크.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21세기에 되살아나, 중세 유럽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생생하게 들려준다.‘백년전쟁’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말로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에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기옌의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일련의 전쟁이란 슬라위스 해전(1340년), 크레시 전투(1346년), 푸아티에 전투(1356년),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잔다르크의 등장(1429년), 카스티용 전투(1453년) 등을 말한다. 누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인가?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죽자 왕위는 발루아의 필리프(필리프 6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해협 건너 또 한 명의 왕위 계승 후보가 있었으니 잉글랜드 국왕의 모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샤를 4세의 누이동생이란 점에서 사촌지간인 발루아의 필리프보다 오히려 우선순위에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 또는 그녀의 아들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파리의 의회는 이사벨을 후보에서 배제했다. 처음에 이사벨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왕권은 불안했고 그에게는 프랑스 국왕에 맞설 만한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아키텐 공국(기옌)을 계속 보유하는 문제였다. 기옌은 잉글랜드가 소유한 웨일스나 아일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영토로서 오로지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만 보유할 수 있는 땅이었다. 힘이 미약했던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충성 신서를 하여 기옌을 지켰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가 기옌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읽었고 프랑스 국왕과 평화를 이룰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1334년 숙적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의 품에 안기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필리프 국왕은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에드워드 3세 또한 그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유럽 최강의 프랑스 Vs. 작고 가난한 잉글랜드당시 프랑스 왕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유럽의 첫째가는 통치자였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훨씬 능가하는 존재였고, 1309년 이후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도 다소간 지배했다. 개전 시점에, 플랑드르와 브르타뉴, 기옌과 같은 반(半)자치 지역을 제외하고도 필리프 6세는 왕국의 4분의 3 이상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달했고 이는 잉글랜드의 다섯 배였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 숲과 황야가 더 많은 나라였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재산은 양모였다. 또 프랑스의 국왕과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장궁이 판금 중기병을 무릎 꿇리다프랑스 기사 계급은 필리프 6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하고 있었고, 재위 초기에 필리프 6세가 이끈 중무장 기병 부대는 명실공히 서유럽의 최강 부대였다. 반면 잉글랜드는 개전 직전에야 겨우 약간의 빛을 발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오래도록 고전을 면치 못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1333년에 처음 승리를 맛보았는데, 승리의 원동력은 장궁에 있었다. 장궁은 분당 10~12발을 쏘아올려 하늘을 까맣게 덮을 수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판금 갑옷도 뚫을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지만, 아직 해협 건너에는 그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원정을 떠나 크레시 숲 근처에서 필리프 6세의 3만 병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크레시 전투는 일종의 군사 혁명을 예고한 전투였다.전쟁이 돈 버는 사업이 되다잉글랜드인들에게 백년전쟁은 모험적인 비즈니스였다. 돈 놓고 돈 먹기였다. 높은 이익을 기대하고 벌이는 하이리스크의 투기적 사업이었다. 엘리트부터 기층 민중까지 온 나라가 정복 사업과 약탈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에 잉글랜드는 주로 본국의 세금과 특별세금, 은행가와 상인들이 빌려준 돈으로 전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자금으로는 전쟁을 치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모아도 한 달 이상의 전쟁 수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슈보시와 파티스, 몸값 받아내기 등의 관행이 일찌감치 제도화되면서 해결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일종의 중세적 ‘총력전’을 목표로 슈보시(chevauche e), 즉 체계적으로 적의 경제적 기반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전리품은 잉글랜드군이 전쟁을 지속해나가는 중요한 자원이자 동력이 되었다. ‘약탈’ 외에도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했다. 가장 수익성이 좋은 방법은 포로들의 ‘몸값’을 받아내는 것, 즉 포로에게 자유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잉글랜드군은 ‘파티스(patis)’라 불리는 보호비 갈취를 통해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엘도라도가 된 프랑스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에서 얻은 어마어마한 부는 본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고, 잉글랜드인들에게 프랑스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다. “프랑스 부인들이 자신들이 잃은 것을 한탄했다면 잉글랜드 부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전쟁의 단맛을 본 사람들은 언제든 전쟁이 재개되기를 희망하였다. 백년전쟁 기간은 출세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빈한한 이들도 전쟁에 참여하여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전쟁 와중에, 젠트리 가문들이 쉼없이 죽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부상하여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있었다. 귀족은 그들대로 전리품 덕을 보았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획득한 부로 성과 교회를 지었고 병사들을 고용했다.흑태자의 기적 같은 승리1350년부터 1364년 사이의 주역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장 2세였다. 기옌의 국왕 대행으로 임명된 흑태자는 1355년 1,000킬로미터를 행군하며 무수한 마을과 촌락들을 대상으로 슈보시를 전개했는데, 여정의 막바지에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추격을 받아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이에 양군은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는 약 2천6백 명의 병력으로 2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고, 특히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이에 힘입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자리를 무력으로 차지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상에 임하여 1360년 브레티니조약을 체결했는데,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기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등 다른 많은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잉글랜드에 내주어야 했다. 현명왕 샤를 5세의 프랑스 영토 회복하지만 잉글랜드만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프랑스 군주 가운데 한 명인 현명왕 샤를 5세는 브레티니조약에 대하여 명시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힘을 회복했다. 그는 계승 분쟁으로 어지러웠던 브르타뉴를 프랑스의 품안에 끌어들였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잉글랜드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악인왕 샤를을 중앙 정치 무대에서 몰아냈다. 또 플랑드르를 우호 세력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넘기는 데 성공하였다. 무엇보다 강성한 프랑스의 국력을 토대로 샤를 5세는 기존의 ‘고용 계약’ 체제를 어느 정도 허물고 상비병력(중기병 3~6천, 석궁병 800명)을 모집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하였다. 샤를 5세에게는 영토 회복 전쟁을 수행할 베르트랑 뒤게슬랭이라는 훌륭한 지휘관이 있었다. 푸아투, 라로셸, 앙구무아와 생통주 전체,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이 차례로 프랑스에 귀순하거나 함락되었다. 샤를 5세의 최전성기에 잉글랜드 세력권인 아키텐 공국(기옌)은 에드워드 3세 때보다도 작게 축소되었고, 북부 또한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 정도만이 남아 있는 형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내분, 적을 초대하다프랑스의 내분은 영국보다 더 심각하여 순식간에 샤를 5세의 유산이 증발한 것은 물론 나라를 망국의 지경으로 몰고 갔다. 어린 샤를 6세에게는 강력한 인척이 두 명 있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는데 둘 다 프랑스를 지배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대립했는데 이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시끄러운 언쟁과 맞비난으로 샤를 6세를 위한 국왕 자문회의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거리에서는 두 정파의 추종자들이 난투극을 벌였다. 그러다가 1407년 11월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 공작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각을 들킨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 빠져나와 있는 힘을 다해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이후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프랑스, 특히 파리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무장한 채 서로 항쟁하는 지경이 되었다. 헨리 5세, 프랑스 왕이 될 근거를 확보하다프랑스인들 사이의 이 치명적인 분열 덕분에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많은 지역들을 정복하고 종국에는 프랑스 왕에게서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프랑스로서는 안타깝게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는 잉글랜드보다 서로를 더 지독하게 미워했고, 두 정파는 단합하기보다 서로 헨리 5세를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했다. 그리고 결국 부르고뉴공 필리프가 헨리 5세의 마음을 얻었다. 헨리 5세는 1420년 5월 트루아에 도착하여 샤를 6세와 함께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Haeres et Regens Franciae)이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아직 샤를 6세가 죽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자격을 약속받은 순간이자, 프랑스로서는 역사에 매우 드문 굴욕의 순간이었다. 앵글로-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전성기헨리 5세가 죽은 후 7년간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성공적인 시절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프랑스 왕 샤를이 곧 사망함으로써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겸하게 되었다. ‘앙리(Henri)’ 국왕은 섬처럼 고립된 몇몇 도팽 세력 지역을 제외하고는 루아르강 북쪽의 프랑스 전역에서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마침내 잉글랜드 국왕이 나머지 프랑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을 진짜 기회, 백년전쟁이 시작된 이유가 해소될 시기가 가까이 온 듯했다. 이중 왕국은 순조롭게 굴러갔다. 이중 왕국을 떠받친 것은 섭정 베드퍼드와 그의 위대한 장군 솔즈베리 백작, 20년 넘게 그들과 함께 전장을 헤쳐온 대단히 재능 있는 일단의 팀이었다. 때로는 파리 시민들도 이중 왕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싸웠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프랑스 왕은 대관식을 올리다잔 다르크는 도팽을 만나서, 신이 자신한테 잉글랜드인들과 싸우고 국왕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의 구원에 나서기에 앞서 베드퍼드 측에 서신을 보냈다. “천상의 왕께서는 너희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라고 나를 보내셨다. 부디 너희들의 땅으로 떠나라.” 초반에 그녀는 연달아 승전을 거두었고 그녀의 명성은 파테 전투 이후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도팽을 설득하여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향하였고 거기서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신이 잉글랜드인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카스티용 전투, 프랑스의 대포가 백년전쟁을 끝내다전쟁 말기에 잉글랜드의 재정은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정복지의 수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유지되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특별세를 재도입하여 성공적으로 그 세금들을 거둬들이고 있었고, 유동 현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이르러 국력과 체제의 정비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압도하였다. 특히 백년전쟁의 막을 내린 것은 ‘대포’였다. 백년전쟁의 초창기에 잉글랜드 장궁의 활약과 프랑스 중기병의 몰락은 많이 알려졌으나, 후반기 프랑스 대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다. 장 뷔로는 15세기 전반기 내내 화약과 주조 기술을 서서히 향상시켰고, 1453년 마지막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1만 병력을 다수의 대포로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근대 민족국가의 맹아가 싹을 틔우다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민족 감정을 형성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두 나라는 향후 절대왕정 체제와 국민국가로의 경로를 걷는다. 백년전쟁을 거치는 동안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백년전쟁의 무정부 상태와 유혈의 책임이 잉글랜드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루티에들(자유 부대: 계약이 종료된 용병) 가운데 프랑스인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을 죄다 “잉글랜드인들”로 여겨졌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을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먹잇감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증오심과 경멸감을 키워나갔다. 전쟁 초기에 왕실의 제1언어는 프랑스어였으며 국왕들의 정체성 또한 프랑스인과 구별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잉글랜드의 주전파들은 “프랑스 국왕은 전하의 주적이자 전하 왕국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상식을 언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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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7대 불가사의 이야기 (리커버 판: 미스터리 역사 스토리) (커버이미지)
    [역사]세계 7대 불가사의 이야기 (리커버 판: 미스터리 역사 스토리)
    • 세계문화연구회 엮음
    • AlbaLux
    •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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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역사 고대, 크레타 미케네 아테네 스파르타 테바이 마케도니아 고대 로마 (커버이미지)
    [역사]유럽 역사 고대, 크레타 미케네 아테네 스파르타 테바이 마케도니아 고대 로마
    • 탁양현
    • e퍼플
    •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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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권력은 세계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나 - 믿음의 흥망성쇠로 이해하는 세계사 (커버이미지)
    [역사]종교 권력은 세계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나 - 믿음의 흥망성쇠로 이해하는 세계사
    • 우야마 다쿠에이 (지은이), 안혜은 (옮긴이)
    • 시그마북스
    • 2022-02-24

    태초에 종교가 먼저 있었다국가를 다스리는 도구이자 힘, 종교!집단 혹은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자는 영토, 자원, 기술이라는 3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을 지배 도구로 삼아야만 경제적·군사적 우위에 설 수 있고, 그래야 우두머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이다. 3요소는 눈에 보이는 핵심 도구이면서 가시적인 위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엄청난 위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있다. 바로 종교다!종교를 단순히 ‘신성한 것’으로만 이해하면 그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종교도 결국은 권력이자 힘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감춰졌을 뿐 왕권 못지않은 힘들 휘두르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회를 침식한다는 데 있다. 이런 정신적인 침투는 사회라는 집단의 생각을 바꾸고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힘을 불어넣는다.종교는 문명의 기반이다. 문명은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는 역사의 단위다. 각 나라의 문명이 무엇이고,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등을 논할 때 종교는 필수 요소다. 어쩌면 종교가 있기에 국가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외신을 보면 단기적인 뉴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이는 ‘우리’와 ‘그들’의 문명, 특히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종교 세력’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좀 더 폭넓게 바라보는 틀이 될 수 있다.세력이자 힘이자 권력인, 종교!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역사 속 힘의 발자취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타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정신적인 도구’가 바로 종교의 본질이다. ‘신성함’으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종교도 권력이다. 세력이자 힘이자 권력인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공성의 가면을 쓴 채로 활동한 것이다.『종교 권력은 세계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나』는 ‘종교×지정학’ 관점으로 세계의 역사를 이해한다. 이 책은 4개의 파트와 3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유교문화권의 동아시아를 다루는데, 중국이 핵심 지역이다. 유교의 시작인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티베트, 대만 등을 다룬다. 각 지역이 유교의 핵심 지역인 중국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 분석한다. 2부는 인도·동남아시아의 다신교 상황을 알아본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이슬람교가 각 지역 왕권과 어떤 식으로 결합해 흥망성쇠를 보였는지 상세히 다룬다. 3부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유럽의 상황, 특히 기독교가 어떻게 분열되고 동맹을 맺는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특히 ‘돈’을 둘러싼 기독교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다룬다. 마지막으로 4부는 중동·중앙아시아·아프리카의 이슬람교를 정리한다. 이슬람 세력의 교리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그것이 해당 지역의 역사에 어떤 식으로 세력을 떨치고, 또 세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신은 말없이 침묵하는 자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뜻에 따라 늘 큰 목소리를 낸다. 이 책은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행하고 큰 목소리를 낸 발자취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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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로 읽는다 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1 (커버이미지)
    [역사]지도로 읽는다 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1
    •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노은주 옮김
    • 이다미디어
    • 2018-09-21

    ‘역사’와 ‘지리’와 ‘지명’으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세계사“지도 하나로 세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역사와 지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지도에 표시된 지명에도 숨겨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세계사와는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생생한 지구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역사’와 ‘지리’와 ‘지명’을 알맞게 조리해서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세계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유사 이래 인류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어내는 통찰력도 땅에 새겨진 생생한 역사 읽기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지리와 지명을 중심으로 지도 위에다 세계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인물 중심의 세계사를 탈피해 인류의 역사가 새겨진 땅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 인류 사회와 문명의 확대를 ‘지리적’, ‘공간적’으로 해설함으로써 기존의 세계사와는 다른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리와 지명이 새겨진 지도를 통한 세계사 읽기는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세계지도 위에서 입체적으로 세계사를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역사의 움직임과 흐름은 지리적 조건이나 지정학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곧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쟁, 문명의 조우와 충돌, 영웅의 탄생과 소멸은 모두 지리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쟁이 언제나 일어난 곳에서 일어나듯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바뀌지만 땅은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지리, 지형과 함께 지명에 관한 역사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지명은 인간과 땅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지역적 특징에 대한 오랜 기록이기도 하다. 지명의 유래와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에 대한 식견과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지명이 어떤 민족과 언어에서 유래되었는지, 또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왜 이렇게 움직이는가, 어디서 어떻게 역사의 변곡점이 만들어지는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민족의 분쟁과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등등 역사적 사건들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펼치고 지리와 지명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어느 새 역사적 진실과 실체에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세계의 역사는 지리, 지형, 기후, 민족, 정치, 전쟁, 문화 등 여러 요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결과물이다. 그래서 세계사를 공부할 때는 땅을 중심으로 자기 나름의 지리적 공간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세계지도 위에서 입체적으로 세계사를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책의 내용과 특징각 지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면서 입체적으로 해설하는 세계사이 책의 지도에 표시된 지리와 지명에는 각 지역의 역사와 언어적 특성이 반영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세계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지도를 중심으로 세계의 여러 지역을 살펴보고 있으며, 지명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이 책은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생부터 출발해 세계사를 지역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각 지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면서 입체적으로 해설하며 세계사의 움직임과 흐름을 개관하는 방식이다. 예들 들면, 1단계는 4대 문명의 탄생과 확대하는 지중해 문명의 시기, 2단계는 지중해를 제패한 이슬람 세계를 다룬다. 3단계는 세계로 진출하는 유럽의 팽창 시대, 4단계는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변화를 설명한다.1단계 - 4대 문명의 탄생과 지중해로 확대되는 문명사막 주변의 초원(스텝)에서 농업이 시작되며, 5000년 전에 유라시아 5대 하천 유역의 충적평야에서 4대 문명이 형성되었다. 1)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 지중해 동부로 확대2)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 소아시아, 시리아, 이란 고원으로 확대3)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 갠지스 강 유역과 남인도, 동남아시아로 확대4) 황하 유역의 ‘황하 문명’ → 몽골 고원, 한반도, 일본, 베트남으로 확대2단계 - 이슬람과 몽골이 주도한 유라시아의 대변동서아시아와 지중해 남쪽 절반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도의 ‘대정복운동’(민족이동)에 의해 무너진다. 이에 따라 서아시아와 지중해 대부분은 이슬람제국이 지배했고, 지중해 북부만이 기독교의 세계가 되었다. 즉, 서아시아와 지중해 남부의 이슬람 세계와, 지중해 북부의 유럽 세계로 ‘분열’된 것이다.이후 11세기에 이슬람제국을 정복한 셀주크 왕조와 13세기에 등장한 몽골제국 등 기마 유목민이 동서양에 걸친 광대한 유라시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3단계 - 세계를 압도한 유럽의 팽창과 아메리카의 유럽화 유럽 세계는 한 때 이슬람 세계에 압도당했지만 대개간 운동과 십자군 운동 등을 통해 세계사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대항해 시대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제2의 유럽’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지표면의 70%를 차지하는 해양을 지배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19세기가 되면서 유럽 세계는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합리적인 사회시스템,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 그리고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4단계 - 중국과 인도 등 변화하는 동아시아 세계중국과 인도, 한국, 일본 등 전통적인 세계를 유지해 온 아시아 세계는 이곳으로 진출한 유럽 세력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한 20세기 전반의 심한 변혁기를 거쳐 이제는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 동남아시아 등의 세계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세계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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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 (커버이미지)
    [역사]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김진연 옮김
    • 제3의공간
    • 2017-12-07

    역사분야 베스트셀러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의 저자,미야자키 마사카츠의 역사 총합본.“역사는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세계사 주요사건과 한눈에 들어오는 지리정보.세계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 빠른 시간 내에 세계사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과 핵심을 짚어준다.베스트셀러를 포함해 다수의 역사서를 집필한 저자는 대학교수에서 물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역사를 강의하면서 세계사를 조금 더 쉽게 알리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왔다. 여러 가지 강의 기법을 도입하면서 시행착오도 거듭했다. 이 책은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영화 한 편을 빨리 돌려 보는듯한 느낌으로 역사를 쭉쭉 읽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썼다고 한다. 세계사는 늘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1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하천 문명이 그 주인공이었다면 2편에서는 그리스, 로마 제국에서 유라시아, 몽골제국에 이르는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이때의 주인공들은 말을 타는 기마민족들이다. 그러다가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면서 네덜란드와 영국 같은 소국들이 뛰어난 항해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으로 영토를 넓혀나간다. 대서양과 신대륙의 발견까지 이어지면서 자본주의의 토대가 놓이고 바다의 세계사가 육지의 세계사를 삼켜버린다. 이런 세계 규모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의 각성으로 이어지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구세력이 몰락하는 가운데 신흥국가인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미국의 주도하에 글로벌화가 진행된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넘어온 지금, 앞으로도 이런 구도가 계속될 것인가?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지도를 보면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터키), 청 제국(중국), 그리고 무굴 제국(인도)이 유라시아 재역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대서양 주변 지역에서는 유럽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국민국가체제로 구성된 ‘큰 세계’가 대두했다. 당시 미국은 갓 독립한 나라였고,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200년이 흐른 지금, 유라시아 제국은 붕괴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렵고 근대를 견인해 온 유럽도 혼란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서양이 태평양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대하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역사의 ‘맥’을 잘 짚는 것이다. 저자는 35개의 ‘키포인트’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나 현상을 요소 요소에 배치했다. 또한 세계사의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지도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책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지도들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어 이해를 돕고 있다. 세계사가 너무 방대해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거나, 빠른 시간에 세계사의 주요 포인트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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